치아교정

2017. 1. 18. 00:36 - 쓰디쓰다

2004년 이었다.

박원장님을 본 것 말이다.

 

나는 막 제대를 하고, 

그 당시 여느 예비역처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치과에서 일하는 누나의 손에 이끌려

치아교정을 시작했다.

 

누나가 내게 치아교정을 권했던 이유는

당시 병원에 새로운 교정선생님이 오셨는데,

이전 선생님과는 실력이 눈에 띄게 다르다는 것을

옆에서 서포트하면서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나 말에 의하면 교정방법도 전문적이고

특히 손이 엄청 빠르시다고 했다.

(지리산으로 사라진 전설의 타짜가 아닐까 싶다고..)

 

박원장님(당시 교정선생님)은

내 구강구조를 보고 거대한 혀를 가지고 태어난 근래 보기드문 인재라고 하셨다.

 

'거대 혀 증후군'

원장님께서 황급히 명명하신 증후군을 가진 나는

혀가 아랫니를 밀어내는 힘이 강하여 

아랫니가 윗니 선을 넘어 밀려나왔다.

청소년기 비염을 앓고 있어 자내깨나 입으로 숨을 쉬는 버릇 또한

혀가 아랫니를 더욱 더 미는 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아랫니가 나온 부정교합인이 되었다.

 

그리고 윗니를 보면 드라큐라처럼

양쪽 송곳니가 귀엽게(자칭) 나와 있었는데

이는 윗니가 나오는 공간이 작아서 그렇다고 했다.

 

원장님께서 제안하신 방법은

양악? 상악? 하악? 뭔지 까먹었다.

무려 13년 전의 일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구강외과에서 턱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이어 치아교정을 하여 새로 태어나라는 지시였다.

 

아버지는 천만원에 육박하는 수술비를

아들의 치아에 투자해보자 결정을 내려주셨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 발치를 하려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발치 담당이신 치과 원장님은

내 몸에서 몇 안되게 잘 자라 준 가지런한 사랑니를 보시더니

"남자가 턱수술까지 해야겠어? 그냥 살지?" 하셨다.

우유부단함과 지조없는 팔랑귀를 가진 나는

엉겁결에 "네, 알겠습니다."했다.

 

결국 사랑니 포함 8개를 빼려던 계획에서

송곳니 옆 별 역할을 못하는 작은 어금니 4개만을 뺐다.

 

이 때부터가 박원장님의 고난의 시작이었다.

축구장에서 공이 침투할 공간을 열어주는 박지성처럼

이를 새로 배치할 공간을 열어줘야 하는데,

좁은 구강에서 공구를 쥔 박원장님의 손은 홀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만 22세. 입천장 뼈가 쪼개질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입천장에 기구를 고정했다.

기구가 들어간 공간만큼 나는 "이" 발음을 포기했다.

다행히 아직 덜 자란 정신연령만큼

입천장도 덜 자랐는지 쪼개졌다.

(만일 정신연령과 입천장뼈 나이가 비례한다면 아직도 쪼개질지 모른다.)

 

잇몸에 스크류를 박고, 고무줄을 끼워 당겼다.

병원을 갔다온 날이면

부드러운 쌀과자도 눈물을 흘리며 먹어야 할 정도로 이가 얼얼했다.

아무개는 치아교정후 몸무게가 10킬로도 더 빠졌다고 하는데

나의 식욕은 너무나 강해 차라리 씹지않고 삼킬지언정

음식을 포기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이를 밀고 당기는 지루한 교정기간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사이 서울에 있는 학교에 복학을 했고,

한달마다 청주로 와서 진료를 받았다.

 

이는 새로 생긴 공간을 채워나갔고,

아랫니는 윗니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약속했던 2년이 되었다.

장치를 제거하는 날 나는 다 끝난 줄 알았다.

 

이제 미팅도 하고, 여자도 사귀고,

김치볶음밥처럼 고춧가루가 다량으로 들어간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식사 후 혼자 몰래 화장실로 달려가 치실과 치간칫솔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원장님은 구강의 자유로움에 들떠서

"아야오요우유" 하며 입을 마음껏 놀리고 있는 내게

선홍색 잇몸이랑 깔맞춤 가능한 고정장치(?)를 건네 주셨다.

가급적 24시간 끼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물론 고정장치는 착탈식이라서 밥을 먹거나 면접같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뺄 수 있어 마우스 프리덤을 보장가능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

다이어트 후의 요요현상처럼 다시 이가 틀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셨다.

 

나는 고정장치를 받아들고 병원을 나왔다.

햇살은 나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2006년 초여름이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가진 덕에

2008년 지금 회사에 입사를 했고,

재작년에는 어여쁜(이 단어를 꼭 써야한다)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2014년이었을까?

친구가 치아교정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먼저 경험한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문득 예전 원장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서울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네이버와 구글을 검색했다.

보통 다른과 예쁜여학생을 뒷조사 할 때나 쓸 법한 방식으로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그것도 남자인 원장님의 성함과 '치과' 등을 검색하여

현재 근무하고 계신 치과를 찾아냈다.

 

친구랑 찾아간 치과

나는 작은 치과만 가봐서 직원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그래서 병원 옆 빵집에서 롤케잌 2개를 샀는데,

수많은 직원수를 보고 손이 부끄러워 다시 빵집으로 갈까 망설였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원장님이 금새 온 것이다.

 

"많이 틀어졌네.." 원장님은 보자마자 내 이를 딱하게 쳐다보셨다.

사실 1년 정도 고정장치를 하다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는 도중 뒷주머니에 넣어논 고정장치가

엉덩이에 짓눌려 깨진 이후 제대로 하지 못 한 탓이다.

기구를 AS할 곳이 없어서 그냥 두었더니 좀 틀어졌다.

(그래서 요즘에는 착탈식 고정장치 대신

이 안쪽에 고정하는 장치를 이중으로 한다고 하신다)

 

그래도 전문가의 눈에 많이 틀어진 것이지

일반인들이 보면 그런 줄 모른다.

그 덕에 지금처럼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지 않은가?

 

원장님은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스켈링하고 가라고 하시고,

또 재즈보컬리스트 윤희정의 "이 노래 아세요"라는 책도 주셨다.

 

원장님은 항상 더 주시려고 하시는 것 같다.

10년 전에도 원장님은 누나가 치과에서 일을 하고 있고,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서울에서 청주까지 매번 내려오느라 고생했다며

한사코 재료비만 받으시겠다고 하셨다.

결국은 그동안 원장님께서 고생하신게 너무 미안해서

그 당시 직원가로 하였으나 그마저도 사실 모자를 것이다.

 

나의 치료비에 대한 언급이 병원 경영악화에 일조할런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원장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것을 받았지만

내가 드릴 수 있는 건 이렇게 글 쓰는 것 뿐이다.

공대를 나온 데다가 이제는 삼십 중반이 되어버린 완연한 아저씨 글이라

젊은 분들에겐 공감이 될 지 모르겠지만

원장님께 느낀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혹시 200일된 딸이 15년 후 치아교정이 필요하다면

원장님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다.

그 때도 여전히 원장님은 삐뚠 치아를 가진 아이들을 교정하고 있겠지 싶다.

아니 그들의 컴플렉스를, 그들의 자신감을 교정하고 있을 것이다.

안경 너머 환한 미소를 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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