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xer

2016. 11. 24. 23:20 - 쓰디쓰다


 
어릴 적 프로복싱 타이틀매치가 있는 날에는
TV 앞에 모여 땀을 손에 쥐고 응원을 했다. 
 
우리 선수가 상대를 때리면 통쾌했고,
반대로 맞게 되면 내가 맞은 양 아프고 안타까웠다. 
 
'땡'하고 금속 벨이 울리면
원투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을 휘두른다.
그리고 다시 공이 울리면
한쪽 구석 황급히 마련된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터진 곳에 바셀린을 메꾸고 피가 섞인 침을 뱉는다.
코치의 쉴새없는 주문을 듣는둥 마는둥 고개를 끄덕이면
어느새 1분이 지나가버려 
요염한 걸음을 걷던 라운드걸도 링밖으로 빠져나갔다. 
 
사각 트렁크를 입고 사각의 링 위에 올라
8온스 글러브 속 깡마른 맨주먹을
쉼없이 앞으로 뻗던 Boxer 
 
Boxer는 나의 아바타였고
링은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서울 한쪽 구석에서 만난 Boxer는
겨울의 늘어진 오후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다리 밑에서 Box를 줍고 있었다. 
 
어디 숨을 데라고는 하나 없는 세상이라는 링 위에서
비록 격렬하진 않을지언정 절박함은 Boxer와 같다. 
 
삶이 때리는 소나기 펀치와 관자놀이를 노리는 훅,
아래 턱을 치켜올리는 어퍼컷을 
가드와 클린치로 겨우겨우 막아가며
흔들릴지라도 주저앉지는 않는다. 
 
박스를 줍건, 또 다른 어떤 일을 하건
지금 어디선가 삶의 링위에서 인생의 중력에 버티는 사람들
그들 모두 진정한 Boxer다. 
 

 

글 2013년 6월
사진 2012년 12월 송파구 장지동 복정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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