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

2017. 5. 2. 12:09 - 쓰디쓰다


사무실 근처에 공원이 있다.
새벽이면 배트민턴 치는 노인들이 있고,
저녁엔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청소년들과
운동기구와 물아일체된 아주머니들이 있다. 
 
공원 한가운데 공터가 있었는데
작년 어느새인가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었다.
바로 사진의 배였다.
나는 일시적인 행사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배는 그대로 있다.
문제는 그 위치다. 
 
그 자리는 아이들이 공놀이도 하고
계단에 앉아서 노닥거리기도 하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발전하고 나아지려면(아니 그렇게 보이려면)
뭔가를 만들고, 새로운 것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채워넣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빈공간은 그대로 비어두게 하는 것이 낫다. 
 
어릴 적 놀이터엔 별다른 게 없었다.
철봉, 그네, 시소가 놀이터 둘레에 있는 정도였고,
놀이터 정가운데 큰 공간은 비어있었다. 
 
아이들은 그 큰 공간에 금을 그었다.
나뭇가지로 그은 금은 이쪽과 저쪽의 편을 갈랐고,
손바닥과 손등으로 나뉘어진 아이들은
때로는 어리고 약하지만 함께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깍두기 삼아 끼워주었다.
그들은 금을 밟고, 때로는 넘나들며
해가 누래지도록 뛰어다녔다. 
 
몇해가 지나 놀이터에는 커다란 정글짐 같은 미끄럼틀이
가운데 자리를 떡하니 잡았다. 
 
아이들은 이제 금을 긋고자
나뭇가지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깡통을 세워놓고 축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어른들이 설치한 기구에 올라 밧줄에 매달리고,
출렁다리를 건너 마침내 꽈리모양 미끄럼틀에서
f=ma 라는 물리학 가속도 개념을 체험하기만 하면 됐다. 
 
놀이터가 커다란 놀이기구로 채워진 만큼
그동안 그 공간을 채웠던
반짝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비었다. 
 
 
사진 : 2017년 5월 사무실 근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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