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이창동 감독)

2016. 4. 7. 00:16 - 쓰디쓰다

 

 

시를 쓰는 사람은 순수하다.
아니 순수해야 시를 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낙옆이 바람에 나부끼는
사소한 풍경에도 금방 감탄하고,
남의 슬픔에 이내 눈물 흘리고 등을 쓸어준다.
그들은 참 단순하다. 복잡하지 않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세상이 이처럼 단순하게 살면 얼마나 좋으랴.
미자의 손자는 범죄의 가해자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미자가 끔찍히 사랑하는 손자는
마찬가지로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가 되었다.
누구라도, 내일 아침이라도 금방 될 법한 가해자.
 
손자를 위하는 것은
창창한 앞날을 위해 죄를 덮어주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른 가담자들의 부모들 생각은 그랬다.
그들의 논리는 괘씸하지만 따로는 고개가 끄덕였다.
 
한 사람당 500만원
생활보호대상자인 미자의 팍팍한 생활과 비교하자면 큰 돈이다.
그것으로 손자의 죄를 숨길 수 있다면
자기 몸을 판다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처음엔 명사를, 그 다음엔 동사,
나중에는 기억을 점점 잃어갈 미자는
행복한 추억을 잃는 것 만큼 손자가 처벌 받은게 두렵고 슬프다.
 
그러나 미자는 순수한 사람이다.
꽃을 보고 감탄하고, 땅에 떨어진 살구를 애틋하게 바라볼 줄 안다.
시를 쓸 수 있는, 시를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순수한 사람은 단순하다. 깨끗하다. 양심을 지킨다.
 
몸을 팔고 돈 500을 협박하여 마련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같이 가담한 다른 친구들에게
밑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경찰에 손자를 넘겨주는 날
피자를 사주고 목욕을 시키고, 발톱을 깍아준다.
몸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하다며 잔소리를 한다.
부디 할미가 없어도 깨끗하게, 순수하게,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마음과는 딴으로 잔소리에 담는다.
 
 
 
 
- 이창동 감독 '시'  (201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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